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 윤또늬긔여어
- 2016년 3월 13일
- 15분 분량

카라×이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
“야, 불교에는 윤회설이라는 게 있어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죽으면 살아있을 동안 지은 죄의 무게에 따라서 다음 생에 태어나난대, 이번 생에 죄가 없으면 인간으로 태어나고, 죄가 많으면 개나 돼지 또는 식물로 태어나고, 너는 죄가 많으니까, 개정도로 태어나겠다."
"하, 그럼 너는 뭐로 태어나는데"
"나는... 아마도 벌레정도?"
"왜, 꽃이 어울리는데. 화려하게 모란정도?"
"부질없다"
"그럼 이치마츠, 뭐로 태어나고 싶어?"
"네가 뭘 할 수 있다고 입을 털어대냐"
"너 죄까지 내가 뒤집어쓰면 되잖아. 응? 뭐로 태어나고 싶은데?"
"...벚꽃"
"의외로 수수하네 역시 너는 모란이..."
"다른 거 다 필요 없어, 모란처럼 향기도 없고 한번 피고나면 죽어버리는 꽃은 싫어. 벚꽃이 되어서 매년, 그 자리에서 가지를 뻗어갈꺼야. 뿌리고 깊게 내려서 그 자리에서 오래오래 살거야, 그렇다면 언젠가는 다시 태어난 너를 볼 수는 있겠지"
늘 그랬듯이 우리는 벚꽃나무 아래에서 만났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고고한 한 마리의 학 같은 이치마츠는 그 성품과 어울리게 봄이면 이 오래된 벚꽃나무 아래서 꽃놀이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 여름이면 꽃이 잔뜩 핀 개울가를 가고 가을에는 들꽃을 구경하러 매일같이 산에 오르곤 하였다. 겨울이면 꽃이 귀해져 내게 금잔화를 꺾어오라며 칭얼거리기도 하고 때로는 칼바람을 이기고 꽃봉오리를 맺은 들꽃을 대견해 하며 몇 시간이고 바라보곤 하였다. 그 정도로 이치마츠는 꽃을 좋아했다. 우습게도 동네 또래들 사이에서 '장미' '모란'등 화려하기 그지없는 꽃 이름으로 공공연하게 불리우던 이치마츠가 좋아하는 꽃은 자신의 화려함을 닮은 꽃이 아닌 거칠게 태어나 오래 살아가는 수수한 들꽃이었다. 특히나 이 오래된 벚나무는 네가 특별히 아끼는 장소였다. 오랜만에 이치마츠가 먼저 약속을 잡았다. 새삼스럽게 신기하여 설레는 마음으로 나는 이치마츠를 기다렸다. 늘 먼저 와서 휘날리는 벚꽃잎 사이에 묻혀 나를 기다렸는데 오늘은 내가 먼저 온 것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치마츠는 나를 보러 이곳에 왔다.
"... 바보자식아, 나 결혼한다."
그런데도 네 입에서 토해진 말은 전혀 사랑스럽지 않다. 한순간 혼란이 찾아왔다. 딱히 결혼을 하기에 부족한 나이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이렇게 말하는 법이 어디 있냐며 이치마츠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너보다 돈도 많고, 너보다 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어"
이치마츠의 집안은 그렇게 잘사는 형편이 아니다. 부자랑 혼례를 올린다면 집안에서는 득이 되는 일이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치마츠 본인의 의사였다, 그런데 괜찮냐고 묻기도 전에 내말은 묵살되었다. 차갑게 유릿조각처럼 쏟아지는 말들에 나는 한마디도 할 수 없는 채였다.
"멍청한 자식, 정말로 너를 사랑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착각도 유분수지 내가 왜 너 같은 놈을 좋아하냐 내가 눈이 거꾸로 박혔냐. 지 분수를 알아야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날카로운 말이었지만 그 말이 진심이 아니란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저 잔인한 말속에서 여린 이치마츠는 홀로 울고 있을 거라는 걸 나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돈이라면 우리 집에도 많아... 그러니까……."
"아아? 너 바보냐, 아까도 말했잖아 너보다 훨-씬 돈이 많은 사람이라고"
"...언제 혼례를 올리는데.."
"내일"
"뭐?"
너무 급작스럽다. 조금의 여유도 주지 않았다. 심지어 바로 이사까지 간다고 하였다. 오늘이 지나면 나는 더 이상, 어쩌면 영원히 너를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가짜라 는걸 알고 있지만 덤덤한 네 표정이, 쉬지도 않고 아픈 말을 쏟아내는 입이, 마치 나보고 빨리 자신을 잊으라 윽박지르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팠다. 나는 아직 아무런 준비도 안했는데도 주문을 걸어놓듯이 이치마츠는 계속 말을 이었다.
"...쯧 간다. 이말 하려고 부른 거야"
차마 '안녕'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이렇게 해서 이치마츠가 행복해진다면, 나는 웃으면서 결혼생활 잘하라고 말해줘야 하는데. 뭐라 말을 꺼내려 입을 열면 울음과 함께 하고 싶었던 말을 모두 쏟아내게 될까봐 앞니로 입술을 터져라 물고는 울음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날 저녁 온 마을은 난리가 났다. 애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마을의 이목을 끌던 이치마츠의 혼례를 축하라도 해주는 듯 어린 여자 꼬마들과 아가씨들은 이치마츠를 치장하기에 바빠 보였다. 머리를 곱게 빗고 차려입은 이치마츠는 마치 선녀가 내려 온 것 같아서 나는 또 주먹으로 입을 막고 눈물을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 * *
내 유일한 소원이 꽃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였는데, 이젠 그것조차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다음 생에 뭐로 태어날까, 벌레만도 못하게 되어버린 내 목숨이 너무 불쌍해졌다. 그중에서 가장 불쌍한 건 카라마츠, 내가 가장 사랑하고 내가 꽃이 되어 태어나길 빌었던 이유도 너였는데 차라리 어차피 벌레로 환생할 운명이라면 카라마츠가 나무나 꽃이 되었으면 한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너를 찾아내어 내 다음 생의 목숨이 끝날 때까지 옆에 붙어있을 텐데, 카라마츠, 너는 죄가 별로 없으니까, 뭐든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치마츠인가?"
"네"
"소문대로 곱구나, 많은 돈이 굴러들어오겠어"
그 자리에는 나를 제외하고도 많은 남자아이들이 모여 앉아있었다. 각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유독 서러웠다. 그래도 큰 죄 않짓고 살아왔다고, 열심히 일해서 카라마츠와의 미래를 생각하며 꿋꿋이 살아왔는데 운명은 너무 잔혹하게도 작은 꿈마저 단칼에 잘라버렸다
"옷을 갈아입고 다시 오거라 손님 받는 법을 알려주마"
"...예"
계집애들이 입는 팔랑거리고 짧은 기모노는 몸에 맞춘 듯이 꼭 맞았다. 불편하기 짝이 없었지만 예쁘기는 하였다. 카라마츠가 보면 좋아했을 텐데... 또다시 눈물이 솟았다. 이제 이렇게 된 이상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계속 그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카라마츠는 강한척하지만 사실은 여리다. 의외로 섬세해서 상처를 잘 받는데, 어제 했던 그 말들 때문에 울고 있지는 않을까 적정되었다. 나는 이렇게 되었으니까, 너만은 평범하게 행복했으면 한다. 너를 위해서 동네 사람들의 입을 막고 그런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했으니까, 너만이라도 나를 잊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딴 생각을 하고 있구나"
"..죄송합니다..."
손님 받는 법을 배우고 그 다음날 나를 지명한 첫 손님이 들어왔다. 주인님 과연 소문대로 유명하다며 좋아하셨다,
"..어서 오세요.. 이번에 처음 손님을 받게 되는 이치마츠..라고 하옵니다.."
이런 굴욕이 어디 있을까, 지금까지 내 처음은 너에게 주고 싶어 지금까지 지켜온 것인데, 차라리 일찍이 너에게 줘 버릴 걸, 그럼 이렇게 허무하게 처음을 생판 남에게 가져다가 바치는 일은 없을 텐데 우스운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을 지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 처음을 가져갈 분
***
"그거 알아? 이치마츠형, 시집간 게 아니라..."
"야, 저기에 카라마츠형!!"
동네 꼬마 애들이 노닥거리는 근처에서 이치마츠의 이름 거론되었다. 2년이 넘어가서야 겨우 들을 수 있는 소식이었다. 다른 어른들에게 잘 지내냐 물어봐도 모르겠다는 대답밖에 돌아오지 않았는데 2년만의 들려온 소식이라는 게 참 날카롭게 찔러 들어왔다. 심지어 시집간 게 아니라니, 그 꼬마의 멱살을 틀어쥐고 물었다.
"다시 말해봐, 이치마츠가 뭐라고?"
"우리 엄마랑 아빠랑 얘기하는 거들었어... 이치마츠 형아는 시집을 간게 아니라, 그, 팔려간거라고..!! 딱하다고 우리 엄마가 그랬어!"
일순간 몸의 모든 신경들이 움직이는 것을 멈추는 듯했다. 팔려가다니, 그럴 리 없다, 분명...
그제서야 그대 조금 달랐던 이치마츠의 말과 행동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일부러 자기를 잊게끔 잔인했던 말들, 거짓말인 게 눈에 보일정도로 눈물에 젖은 목소리 가면을 쓴 것같이 덤덤했던 표정 모두 나를 위한 일이었구나, 이치마츠
그때부터 근처, 유명하다는 유곽은 다 들락거렸다. 너는 이곳저곳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으니까, 싸구려 사창가는 가지 않았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리고 엄청난 미인이 새로 들어왔다는 가계를 찾아내었지만 정작 입구 주변에서 서성거렸다. 혹시 정말로 이치마츠를 만나면 무슨 말을건네야할까, 그렇게도 자존심이 세던 너였는데 혹시나 내가 온 걸 알고 그 굳은 자존심에 작은 상처라도 날까 선뜻 들어가지를 못하고 있던 중 그 유곽의 주인처럼 보이는 늙은 여인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누구를 찾아오신 겁니까?, 혹 소문을 듣고 찾아온 것입니까?"
"그...이..ㅊ..."
"역시 그 아이를 찾으신 게군요, 최대한 소중히 다뤄주십시요. 상처가 많은 아이니"
여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 보니 다른 방과는 다르게 화려하게 장식된 문 앞까지 와 버렸다. 이 안에 이치마츠가 있는 걸까,
"특별실이랍니다. 워낙 예쁘장한데다가 접대도 잘하기에 소문을 타고 몸값이 늘었다고 할까요, 여느 아이들처럼 팔려왔는데 빨리 빚을 갚고 싶다며 쉬지 않고 손님을 받아버리는 아이입니다. 아마도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은 것이겠지요, 팔려온 아이들이면 다 그렇습니다만..."
여인은 난처하다는 듯이 웃었다. 그때 연약한 바람이 불어 여인의 머리 위에 작은 벚꽃 잎이 묻었다. 휘날려진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여인은 꽃잎을 떼어내고는 손가락에 붙어버린 옅은 분홍색의 잎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푸스스 웃으며 붉은 연지를 바른 입술을 열었다.
"딱, 이맘때군요. 이렇게 벚꽃이 휘날릴 때쯤이면 밥 먹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다 제쳐두고 열심히 지요, 작년 봄에는 거의 한 번도 밖에 나간 적이 없을 것입니다. 이런 곳에 한시라도 있기 싫어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럴 때면.. 뭐랄까, 뭐에 쓰인 것 마냥 해버리는 바람에……."
누군가에게 한대 세게 얻어 맞은 듯이 멍해졌다. 벚꽃이 휘날리는 계절은 이치마츠가 가장 좋아하던 계절, 바람이 부는 때가 되면 이치마츠는 꼭 해야 할 일도 제쳐두고 나와 꽃놀이를 갔었다. 그런 이치마츠가 한 번도 밖에 나가지를 않다니, 내 탓이었다. 나 역시 꽃이 좋았지만 꽃에 둘러싸여 있는 이치마츠를 가장 좋아했다. 그런 이치마츠를 사랑했다. 딱히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길이 말 밖에 없었기에 그 모습이 가장 사랑스럽다고 말해버렸다. 그래서 이제 꽃이 싫어진 걸까,
"어머, 말이 길어졌네요. 어서 들어가세요. 저는 이만"
여인은 멋쩍은 듯 웃으며 문을 열어주고는 제 갈 길을 가버렸다. 방안에는 고개를 숙인 이치마츠와 나뿐, 침묵이 흘렀으나 얼마안가 고개를 든 이치마츠에 의해 깨지고 말았다.
"..왜 왔어"
"이치마츠..'
"뭐하려고 왔어, 나랑 그렇게 자고 싶었어? 아님 나 놀리려고 온 거야?"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을 본적이 없었다. 작은 어깨가 부들부들 떨릴 만큼 이치마츠는 화를 내고 있었다.
“어왜.. 이런.."
"아버지가 나를 팔았어, 당연한 거 아니야? 내가 미쳤다고 이런 곳에 스스로 걸어 들어오겠냐."
아차, 말실수를 해버렸다. 이치마츠의 가정형편이 안 좋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버지가 매정하고 동네에서 유명한 술주정뱅이란 것도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자식까지 팔아넘길 줄은 상상도 하지 않았는데,
"미,미안, 실수했.."
"꺼져, 빨리 돈은 안 받을게 그러니까 빨리가.."
"으,응..."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로 나와 버렸다. 분명 돌아가자고, 같이 도망가 버리자고 말하려고 계속 연습해 왔는데 처음 유곽에 발을 딛을 때부터 계속 머릿속에 생각했는데 정작 만나고 보니 입조차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차가운 이치마츠는 처음이라서 그럴까, 머릿속을 누가 깨끗이 물로 씻어 버린 듯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고 눈앞에 보이는 풍경에게서 허겁지겁 도망치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와서야 후회가 되었다. 자신을 구해주기를 이치마츠는 바라고 있었을 텐데, 그 찰나의 순간 이치마츠가 다른 세계의 사람 같다고 생각한 스스로가 역겨웠다.
며칠이 지난 후 다시 그 유곽을 찾아가 보아도 이치마츠가 거부한다는 이유로 문턱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사과만이라도 전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만날 길 조차 닫혀 버린 것이다. 유곽에서 퇴짜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 오래토록 가지 않았던, 케케묵은 우리의 추억이 묻힌 벚나무에 들렀다. 시기가 나빴다. 나무는 마치 이런 바보 같은 나를 비웃는 듯이 가지마다 연분홍의 꽃이 가득 매달고 있었다. 네가 보았으면 참 좋았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울고 있었다.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주제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무력감이 덮쳐와 목을 죄여왓다. 목을 넘어가는 공기가 점점 옅어지고 숨을 몰아쉬어야 할 때쯤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가지에 메달려잇던 연약한 꽃잎들은 하늘하늘 마치 눈송이가 내리는 듯이 빙글빙글 돌다가 홀연히 땅으로 내려앉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네가 참 좋아하던 풍경이었다.
너도 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나와 함께 보았으면 좋을 텐데
내 옆에 있으면 좋을 텐데
눈물은 땅을 향해서 추락해 갔다. 봄을 맞아 바람이 꾸덕하게 말렸던 흙바닥은 미안하게도 금방 비가 온 것처럼 젖어버렸다. 소매로 눈가를 닦아내어도, 어금니를 물어도, 내 몸에 이렇게 물이 많았을까 생각이 들 만큼 눈물 흘러나와 당황스러웠다. 마음이 버티지 못했던 것일까, 이치마츠에게 드는 미안함과 스스로에게 드는 분노, 서글픔, 막막함 지금 드는 말로는 형용하지 못할 감정들을 내 작은 마음에 담기는 무리가 있었던 것인지, 마치 눈물에 모든 감정을 흘려 보내려는 듯 계속 솟아나왔다. 하지만 이렇게 울어서 사라질 감정이라면 처음부터 생기지 말았어야 했다. 아무리 울어도 1초 1초 시간이 흐를수록 눈덩이처럼 불어 마음을 짓눌렀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린다면, 이 감정의 흐름도 멈추게 될까,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는 머리위로 꽃잎이 떨어졌다. 너와 함께 있지 않는 꽃은 의미가 없기에 떼려고 손을 높이 들었지만 손끝에 나뭇가지가 닿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꽃이 만개한 벚나무 사이에 홀로 툭 튀어나와 있는 가지, 마치 꺾어달라고 사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홀로 떨어져나온 가지답게 참 못난 가지였다 구불구불 지 멋대로 자란 것은 물론이고 달린 꽃도 얼마 없었다. 괜히 꺾었다는 생각이 들어 땅에 버리려 하다가 문득 든 생각에 꺾은 가지를 품에 넣었다.
***
"이치마츠"
"그때 그 사람 너랑 무슨 관계니? 보아하니 보통 관계는 아닌 것 같고..."
방에 들어온 주인님은 담배를 한대 머금고는 내게 물었다. 카라마츠를 말씀하시는 듯 했지만 생각을 하자마자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라도 더 빨리 이런곳따위 나와서 조금이라도 더 당당하게 너를 만나고 싶었다. 이미 더러워진 몸으로 너와 미래를 약속할 수는 없지만 한번이라도 좋으니 유곽에 묶인 매춘부가 아닌 당당한 이치마츠의 모습으로 너를 만나고 싶어서 죽기 살기로 일을 했다. 나의 미운 아버지가 빌린 돈만 다 갚으면 나는 자유가 될 수 있다. 그런 자유의 몸으로 너를 만나고 싶었는데 너는 내 작은 소망까지 철저히 무시 해버렸다. 이 제와서 무엇을 숨길까 느릿하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사랑하던 사람이었어요. 여기 오기 전까지는 같이 살 생각도 했던... 정말로 제가 사랑하던...."
역시 카라마츠의 이야기를 할 때는 눈물을 참을 수 가 없다. 그래 내가 사랑하던 카라마츠이다. 나를 사랑해주던 카라마츠이다. 주인님은 슬쩍 웃으면서 작은 상자를 건네어 주었다.
"역시 그럴 것 같더라, 어쩐지 왜 그렇게 까지 열심히 하나 싶었어"
상자 안에는 하얀색의 편지 한 장과 짦게 꺾인 벚나무의 가지가 들어 있었다. 올봄, 아니 유곽에 온지 처음으로 보는 벚꽃 이였다. 전에는 매일매일 보고 또 보았던 벚나무인데, 지금은 네 생각이 나서 냄새조자 맡을 수 없는 꽃이었다. 은은한 향이 코까지 홱 끼쳐왔다.
'너는 꽃에 둘러싸여 있을 때가 가장 사랑스러워-'
그때의 카라마츠의 말이 머릿속에서 울려와 맺었던 눈물은 이내 떨어져버렸다. 너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서, 그때처럼 순수한 내 자신이 될 수 없어서 꽃을 피해왔다. 그런데 이렇게 꽃을 선물하다니, 너는 얼마나 나를 울려야 직성에 풀리는 것일까, 입술을 꼭 물고는 흰색 봉투를 꺼내 일다가, 이내 찢어버린다. 그 누구도 보지 못하게 조각조각 찢어 앞에 놓인 향초로 태워버렸다. 종이가 타는 알싸한 냄새가 방안의 달큰한 공기를 더럽혔으나 그런걸 일일이 신경 쓸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 전해달라고 사정을 하길레.."
"...그.. 그믐달이 언제 뜨지요..?"
"그믐달..? 어 오늘이 하연달이니 내일 밤이면 그믐달이 뜨겠구나"
바보 같은 자식, 못생긴 게 머리까지 나쁘다. 내가 자기를 피하는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적어도 내가 당당해질 시간을 줬어도 됐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가지고 사람을 흔들리게 하는지 정말 알 수 없다. 겨우 마음을 먹었는데 그날, 너를 보자마자 네 손을 잡고 이곳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는데 넌 항상 내 결심을 우습게 만들어 놓는다. 이번에도 발에 묶인 보이지 않는 족쇄를 풀고 너를 다시 찾겠다고 겨우 마음을 먹었는데,
『그믐달이 뜨는 밤에, 벚나무 밑에서, 같이 도망가자,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것으로』
이 따위의 말을 남겨버리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이렇게 내 결심을 다 무너뜨려놓으면 나는 도대체 뭘 보고 살아가라는 거야. 내가 여기서 버티던 이유는 너였는데, 과거는 지울 수 없지만 그래도 당당하게 너를 마주하기 위해 살아왔는데 고개를 숙이자 눈물이 여과 없이 뚝뚝 떨어져 고급종이로 된 장판이 젖어 들어갔다. 가슴 한편이 아파서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 내가 울 때면 네가 항상 나를 달래주었는데 이번에도 그랬으면 좋겠다.
네가 나를 달래주었으면
네가 이 눈물을 닦아줬으면
네가 내 옆에 있어줬으면
그렇지만 그건 불가능하기에 그저 혼자 스스로의 어깨를 감싸 쥐고는 눈물을 흘릴 뿐 이었다.
시간은 금방 흐른다. 몇 년이란 시간도 금방 흐르는데 하루라는 시간은 정말 찰나인 것이다. 오늘도 날은 저물어 오지 않았으면 하고 염원하던 밤은 오고 달은 떴다. 손바닥만 한 창문너머로 가느다란 달빛이 부서져 들어왔다. 아마 카라마츠는 그 벚나무 아래서 기다리고 있겠지, 홀로, 난 가지 않을 것이니. 카라마츠가 미워서가 아닌 더러워진 내 몸으로는 그 벚나무 아래서 추억을 회상할 자신이 없다. 너와 나의 추억이 그득히 담겨 잇는 곳에 어떻게 이런 목줄달인 개의 몸뚱이를 하고 갈 수 있을까
* * *
혹시라도 너를 놓칠까봐 아직 달이 뜨지도 않은 저녁부터 나와 너를 기다렸다. 아직 태양밖에 보이지 않아 네가 오려면 한참이 남았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너와 나를 가장 오래 지켜봐준 친구가 있으니까 외롭지는 않다.
"미안 오랫동안 못 찾아왔어"
나무에 기댄 채 속삭이듯 말을 걸었다. 말을 못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가끔씩 이치마츠의 말에 대답하듯이 가지를 흔들었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 말을 걸어보았다. 그러자 마치 내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가지가 가볍게 흔들렸다. 그 뒤로는 어떤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혼자서도 재밌게 떠들며 이치마츠를 기다렸다. 10년이 넘도록 나와 이치마츠의 시작과 끝을 함께 보았고 어떤 날에도 이곳에 앉아 사랑을 나눴다. 어떤 계절에 있든 내 기억 속에 이치마츠는 환히 빛나고 있었다.
"나무야, 이치마츠.. 올까?"
혼자 넋두리 마냥 떠들다가 다시 물어보았다. 혹시라도 오지 않는다면 그날의 무례를 어떻게 사과해야 하나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곧이어 흔들리는 가지에 안심하고는 이치마츠와의 미래를 꿈꾸었다. 차마 고생을 시키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행복하게 하게 해준다는 말도 못하지만, 적어도 힘들지 않게 할 것이다. 그 사랑스러운 눈에서 눈물이 나오게 하는 일은 없을 것 이고 만약 한 방울이라도 나온다고 하면 나는 그날 자존심이고 뭐고 땅바닥에 버리고 사과하고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마음에 새길 것 이다.
올려다본 하늘은 어느새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달만 뜨지 않았을 뿐 이때쯤이면 올만한데,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보아도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혹시 날짜를 잊은 것은 아닐까, 하다가도 그믐달 날 꽃이 가장 아름답게 핀다고 말했던 너이기에 날짜를 잊을 리는 없다. 불안하지만 나무가 온다고 했으니 너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새삼 나무를 올려다보니 꽃이 예쁘게도 피었다. 물론 너만큼은 아니지만 네가 이 꽃들에 휩싸여 있는 것을 상상하기만 해도 절로 웃음이 지어진다. 하얗고 분홍색으로 물든 꽃잎을 실어 나르는 바람과 그 바람에 몸을 기댄 채 꽃내음을 맞고 있는 너 그 그림 같은 풍경에 마음이 편해진다. 너는 늘 꽃을 동경 왔지만 내게는 네가 가장 아름다운 꽃, 아무리 계절이 바뀌고 어떤 꽃이 피어나도 너는 내게 가장 아름다운 꽃이 될 것이다.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가 크게 흔들리며 기특하게 붙어 있던 꽃잎들이 흩어져 내렸다. 팔을 뻗어 손안에 떨어지는 벚꽃 잎을 가두어놓고는 작은 틈새로 가녀린 아이를 감상하였다. 떨어지는 벚꽃 잎을 잡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도 있었다. 혹시라도 꽃잎이 도망갈까 두 손으로 꼭 쥐고는 속는 셈 치고 소원을 빌었다. 너는 내게 가장 아름다운 꽃이다. 어느 때라도 너는 내게 아름다울 것이고 그 아름다움이 죽을 날 따위 오지 않을 것이다. 시들 날이 올 리 없으니, 그러니 부디
"...피어만 주거라"
내 곁으로와 내옆에서 피어주거라
* * *
밤새 한숨도 자질 못했다. 잘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밤의 짙음이 더 깊어지고 때때로 들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나를 괴롭히는데 잠 같은 걸 잘 수 있을 리 없었다. 지금이라도 나갈까, 당장이라도 뛰어나가고 싶었으나 그 장소에 서린 추억이 나를 막았다.
저녁부터 오는 손님을 모조리 거절하고 치장만 했다. 벚꽃 색 기모노를 몸에 대 보기도 하고 너를 닮은 물색의 옷을 대보기도 하였다 . 결국 마지막 선택은 보라색이었다. 네가 잘 어울린다고 하였으니, 자꾸 눈에 밞혀 어쩔 수 없었다. 화장은 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내 신분을 드러내기 싫었다. 이렇게 해서 감출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약간의 두려움이었다. 혹시라도 내 모습을 보고 네가 실망할까봐, 우습게도 말이다. 나는 나가지 않을 것인데도 그렇게 나를 꾸몄다.
손바닥만 한 창문에서 찬바람과 함께 달빛이 떨어져 들어왔다, 조각조각 덩어리 진채 부서지는 달빛은 손에 담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 양손가득 달빛을 모아놓으면 계속 달이 뜨는 밤일 것 같았다. 그럴리없다는걸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 바보 같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이 밤이 지나면 너와 나는 이별이다, 같은 동내에서 태어나 같이 커왔고 생일조차 비슷한 시기라 성년식도 같은 날에 했다. 당연하게 영원히 함께할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지만 말이다. 꽤나 질긴 인연은 우리 아버지로 인해 끊어졌다. 다시 보고 싶어도 이미 더럽혀진 몸, 목줄달린 개의 행색, 이 모습으로는 그 녀석을 만날 수가 없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러운 개의 모습이라도 목줄만은 푼 채 너를 만나고 싶었는데, 너는 그 기대조차 부숴버렸다. 지금은 네가 나를 미워하기를 바란다. 조금만, 조금만 나를 미워하기를 바란다. 지금당장은 나를 꼴 보기 싫어해도 좋다. 하지만 나중에는 나를 그리워했으면 좋겠다. 이기적인 부탁인걸 알지만 나는 원래 이기적인 사람이다. 그렇기에 가슴 깊숙이 네게 닿지 않을 말을 혼자 되뇌인다. 조금만 나를 미워하라고,
부서져 들어오는 달빛이 조금 옅어졌다. 밤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급한 맘에 달빛을 주워보아도 손에는 그저 허공만이 잡힐 뿐이었다. 늘 그랬듯이 시간은 흐른다. 멈추길 기도하며 우는 순간에도 시간을 흐르고 있다. 새벽은 오고 있었다. 차라리 이럴 때면 네가 나쁜 사람이었으면 한다. 나쁜 사람이라서 나를 미워하고 일찍 집에 들어가서, 다음날 신붓감을 찾아보는 그런 나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너를 선택하지 않은 나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증오했으면 좋겠다. 정말로 네가 그랬으면 한다. 그런데 너는 그런 모진 짓을 못하는 사람이란 걸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새벽이 새어가는 중에도 그 자리를 지키고 오지 않을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쯤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나를 원망하기 보다는 추억을 생각하며 바보같이 웃고 있을 것이다.
어느새 달빛은 점점 옅어져 창문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물을 탄 듯, 어둠이 흐릿해졌다. 농도가 옅어진 하늘과는 달리 내 옷과 이불은 비라도 맞은 듯 축축하다. 나도 모르게 많이 울었던 것이다. 아까 했던 말을 취소하고 싶다. 네가 나쁜 사람이었으면 하지만 조금은 나를 그리워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중에 내가 너를 찾을 때 너는 나를 보고 내가 좋아하는 그 환한 웃음을 보여줄 테니까. 젖은 옷을 벗고 옷장 가장 깊숙한 곳에 박아 두었다. 이제 앞으로 그 옷을 입을 날은 없을 것 같다
* * *
새벽까지 이치마츠를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다. 역시 나는 싫은 것일까, 새벽 공기에 나뭇가지가 조금 흔들렸다. 아까 이치마츠가 올까라는 질문에 분명 온다고 했는데, 나무도 거짓말을 한 것일까 한손을 들어 나무의 기둥을 쓰다듬었다. 이치마츠에게 보여주려고 아껴놓았던 웃음이었는데 대신이라 하기도 뭐하지만 나무에 대고 환히 웃었다.
"나를 위해 거짓말을 하였군..!"
꽃잎이 쌓인 흙바닥에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딱히 나무가 나쁘다거나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치마츠가 나쁘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갑자기 찾아간 자신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소매로 거칠게 눈가를 닦아내었다. 너무 세게 문지른 탓인지 눈가가 따끔거렸지만 최대한 웃으며 뒤돌아섰다. 이 얼굴을 기억해 뒀다가 혹시라도 이치마츠가 나중에, 먼 나중에 찾아오면 그대로 돌려주길 바란다. 무리한 부탁을 추가하자면, 할 수 있다면 이치마츠가 왔다는 신호라도 내게 줬으면 한다.
"이곳에 혼자 찾아올 일은 이제 없을 것 같군, 미안하다"
내 모든 추억은 그대로 안고 갈 것이다, 혹시라도 잊으면 안 되니까, 환히 웃던 이치마츠의 웃음을 눈 안에 새겨둘 것이다. 시시때때로 그리워지면 언제든지 꺼내서 볼 수 있도록 이 눈에 새겨줄 것이다.
꽃은 아름답게 여겨주는 사람이 있다면 시들지 않는다. 수명이 다해 바스라진다고 해도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은 영원히 남는 것이다. 내게 이치마츠가 그렇다. 내 가장 아름다운 꽃, 지금까지 아름다웠고 앞으로도 가장 아름다울 꽃. 그런 꽃과 함께 있었던 순간을 나는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새삼 의지를 다졌다. 꼭 다음 생에는 나무로 태어나리라, 이 벚나무처럼 이렇게 한곳에서 이치마츠를 기다리고 원하던 대로 꽃으로 태어난 이치마츠를 위해 그늘을 내어 줄 수 있는 그런 나무가 되어 다시 태어나리라 마음을 굳혔다. 다음 생뿐만이 아니라 이번 생에도, 그 다음다음 생에도 그러겠다. 나는 평생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네가 찾아오기 쉽도록, 다시 나를 만나러 올 네가 나를 찾기 쉽도록
그렇게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듯이 많은 것이 바뀌었다. 주변에 풍경이 바뀌고 나와 함께 이곳에 들어왔던 어린 소년들도 제법 어른 티가 났다. 그 긴 시간동안 바뀌지 않는 것은 나뿐이었다. 여전히 손님을 받는 것은 구역질이 나 1시간에 한 번씩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여전히 카라마츠가 그리웠다. 한시도, 잠자는 순간까지도 너를 잊은 적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너를 그리워했다. 네가 나를 기억했으면 좋겠지만 또 네가 나를 잊었으면 한다. 나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으면 하지만 반대로 기억하고 있었음 했다. 모순적인 바람들은 엮기고 또 엮여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오늘 내 아버지가 지었던 빚을 다 갚아 내었다. 얼마나 많은 빛을 진 것인지, 같이 들어온 또래들은 다 나갔지만 나만 남은 채 빛을 갚아왔다. 그러한 결과로 오늘 나를 옥죄었던 목줄을 끊어버렸다.
"..갈꺼니?"
"네, 잘 해주셨는데.."
"아쉽구나, 네가 우리 기당에 명물이었는데 네가 없으면 우리는 뭘 벌어먹고 살꼬"
장난스레 웃으면서 주인님은 내게 봉투를 내밀었다. 안에는 적지 않은 돈이 들어있었다.
"너만 준 게 아니라 다른 애들도 다 주었다 그러니 쓸데없는 오해는 말거라"
"..죄송하지만 이 돈은 싫습니다. 이런 증거를 새기고 나가고 싶진 않거든요."
그대로 돈을 돌려준 뒤 옷장 깊숙이 처박아두었던 보라색 옷을 꺼내었다. 역하지 않은 먼지 냄새가 올라왔다. 조금은 그리운 냄새이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주인님이 나를 보며 빙그레 웃음 짓고 계셨다.
"역시 보라색이 가장 잘 어울리는구나."
얼마 없는 짐을 챙겼다. 이제는 입을 수 없는 옛 옷가지들과 이제는 생명을 다해 꽃은 둘째 치고 본 가지마져 말라비틀어진 내가 가장 소중히 생각하는 벚나무 가지를 보따리에 넣었다. 여기에서 받은 것은 하나도 챙기지 않았다. 여러가지 옷들도 화장품도 값비싼 장신구들도 아무것도 챙기지 않은 가벼운 짐을 들고 당당히 기당의 문턱을 밟았다. 이제 너를 만나러 간다.
1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많은 것이 바뀐다고들 하지만 나는 바뀐 것이 없었다. 너를 제외한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을 수 도 없으니 동네 꼬마아이들에게 노총각소리를 듣고 살고 있다. 그리고 작은 꽃가게를 열었다. 그래봤자 네가 좋아하던 꽃들만 취급하지만 꽃을 볼 때마다 네 생각이 나서 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았더니 어느새 꽤 인기 있는 꽃집이 되었다. 말하기 부끄러운 비밀이 하나 생기기도 하였다. 아직도, 그믐날 밤이면 그 벚나무 근처를 기웃거린다는 것이다. 가까이 가지는 못하지만 그날이면 꽃집의 문을 닫고 먼발치에서 바람이 실어 나르는 꽃향기를 친구삼아 하루 종일 너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날은 어느 높으신 분이 온다고 해도 딱 거절하고는 너를 기다린다. 단 하루도 너를 잊은 적이 없다고 말하면 거짓말을 친다고 비웃을 것 같지만 사실이었다.
"...오늘따라 꽃이 환하게 피었구나."
너는 정말로 꽃의 아이었던 것이 분명했다. 네가 가고 난 뒤 귀족들의 소풍장소가 되기도 할 정도로 탐스럽게 꽃이 자라기로 유명한 그 벚나무가 시들해지는 것이다. 작년 봄에는 마치 수명을 다 한 것처럼 시들해져서는 꽃도 많이 못 피워 본채로 봄이 지나가버렸다. 그런데 이번 봄에는 무슨 까닭인지 10년 전처럼 탐스럽게 피어다. 마치 과거로 돌아간 듯 한 모습에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렸다. 뜷어져라 나무만 바라보고 있었더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그믐날 밤이면 늘 그렇듯 어둠의 농도가 짙었다. 어둠이 깔린 하늘 아래에 하얀 벚나무는 마치 이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아음다웠다.
"나무여, 아직도 이치마츠는 오지 않은 건가"
나직이 혼자 중얼 거렸다. 그러자 나뭇가지가 약하게 흔들렸다. 분명 바람은 불지 않았다. 내 눈이 틀린 것이 아니라면 분명 가지가 흔들렸는데, 혹시 라는 생각이 머릴 스치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기면서도 혹시 내 착각이면 이치마츠가 오지 않았다면 그때 느껴질 잔인한 감정이 회오리 쳤다. 하지만 남자가 그런 것을 겁내면 안 된다고 다잡으며 무거운 말을 떼었다. 혹시 이치마츠가 왔다면 다시 돌아왔다면 한시라도 빨리 가야한다. 불안과 기대를 안고 어느새 발은 뛰듯이 빨리 걸음을 옮겼다.
나무근처에는 10년 동안 눈에서 잊은 적이 없는 익숙한 그림자가 서 있었다. 아니 조금 키가 컸나, 그런건 아무래도 좋다. 달 짝이던 입술을 떼고 이름을 발음했다. 10여 년 동안 한 번도 잊은 적 없던 그 이름을
".이치마츠"
그림자가 뒤돌아섰다. 보라색옷을 입은, 분명한 이치마츠였다.
"...카라마츠..?"
구르듯이 뛰어가 가는 팔목을 붙잡았다. 내 이름을 부르고 놀란 토끼눈이 되었다가. 이내 부드러이 웃으며 입술을 떼었다.
"미안, 좀 늦었어"
큰 바람이 불어와 가득 핀 벚나무의 가지를 흔들었다. 여린 꽃들은 흐트러지며 마치 눈송이처럼 두 사람을 감싸 안았다. 그것이 하늘이 내린 축복이라도 되는 양, 두 사람은 환히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화상적인 풍경은 한 폭의 그림같았다고 가히 말할 수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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